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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제11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 수상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졸업생 김나현

작성일
2023.04.17
수정일
2023.04.18
작성자
문예창작학과관리자
조회수
760


[2021 제11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 수상자 김나현]

(당선작, 안의 세계」)



심사평


김금희  예심 과정에서 알게 된 변화는 퀴어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대신 그 자리를 오피스물이 대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변화는 시장의 반응에 따른 결과일까. 시장의 요구와 그에 부응할 새로운 텍스트와 작가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일까.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런 텍스트들이 재현이나 전달이외에 적어도 타인에게 읽히는 글이 갖추어야 할 적절한 문장과 가독성, 더 나아간다면 한 편의 글이 공공의 자리에서 소비될 때 그에 맞는 밀도와 완결성은 갖추기를 바라며 읽게 되었다. 당선작이 된 안의 세계역시 오피스물이라면 오피스물일 것이다. 갑자기 실종된 회사 내 아웃사이더 백 과장이 있고 그런 그를 어쩔 수 없이 상사 대접을 해줘야 하는 가 있다. ‘와 백 과장은 여러모로 얽힌 지점들이 있는데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닌데도 집까지 데려다주어야 하는 감정 노동의 관계이고 더 나아가 금전적 관계까지 맺게 된다. 그렇게 물고 물리는 갑을 관계가 된 상황에서 는 백 과장의 행방에 대해 알고 있을 부동산 중개인 방아짐을 만나 어떤 새로운세계에 진입하게 된다. 이 소설은 자신의 생활과 거주지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이십대 사회 초년생의 생활을 핍진하게 다루는가 하면 이 없는 방아짐이라는 가상의 설정 그리고 백 과장의 실종이라는 미스터리까지 더해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나는 이 소설을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읽었는데 그것만으로도 투고자가 지닌 소설적 능력을 기대하게 했다. 또한 이 작품의 백미는 백 과장과 노숙자의 감정적 대결이 펼쳐지는 저녁식사 신일 것이다. 빈자들을 열심히 도왔던 백 과장의 행위 이면에 타자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와 기만이 자리했음이 밝혀지는 순간, 독자에게 전해지는 진실은 놀랍고 불온하다. 이 장면이 너무도 충격적이었으므로 내게는 안의 세계 이외에 다른 선택지란 없었다.


임현  (…) 예심에서부터 흥미롭게 읽은 안의 세계사라짐 속에서 볼 수 있는 풍경들을 근사하게 재현해낸 작품이었다. 이 소설을 []’에 들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 정도로 요약하더라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닐 테지만, 이러한 건조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거쳐야 하는 서사는 결코 단조롭지 않았다. 더욱이 ()’이 사라진 이유나 원인에 대한 설명을 과감하게 생략하는 대신, 인물들의 사연을 풍부하게 채워 넣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는데, 무엇보다 1인칭 서술자인 이레를 비롯하여 백 과장방아짐’ ‘발목 삼촌등으로 이어지는 인물 간의 느슨한연결성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요컨대 안의 세계의 가장 중요한 메타포는 분명, ‘눈이 없지만 볼 수 있는 기이한 존재(방아짐)’임에도 그것과 인과적으로 무관해 보이는 제3의 인물들(백 과장, 발목 삼촌)의 대화 역시 공들여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방아짐이 아니더라도 두 사람의 대화가 나름대로 고유하고 특별한 의미를 이미 지니고 있다는 점, 그럼에도 방아짐의 서사와 함께 읽을 때 또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점. 나는 이것이 어떤 훌륭한 소설들이 갖추고 있는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더 많은 사람들과 안의 세계를 함께 읽을 수 있어서 무척 기쁘다.



수상소감


  작년 이맘때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소설을 한 편 썼다. 사실 지난 2년 동안 나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소설 쓰기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믿을 수 없는 소문만 골라 전하는 사람처럼 소설의 줄거리만 떠벌리고 다녔다. 들어준 이들의 미묘한 반응에 낙담하거나 즐거워했다. 그리고 방에 들어앉아, 아무도 안 보는 소설을 쓰자, 이상한 결심을 했다……

  라고 하지만 실은 아무도 안 본 것은 아니었다.

  꼬박꼬박 여러 공모전에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연히 내 소설을 집어 든 어떤 심사위원이 공식적으로 최초의 독자가 되는, 그런 소설이었고, 심사평에 언급되지 않으면 이번 소설은 아무도 읽지 않았네하면서 씁쓸하고 담담한 마음이 되었다. 그러다가 내 나이가 벌써 서른 중반이 넘어간 것을 깨닫고 불안해졌다. 나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해질 때가 있었다. 마흔이나 쉰, 예순, 칠순까지도 소설을 쓰고 있을까. 미래를 그려보다가 마지막에는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작가들을 떠올렸다.

 

  작년 이맘때 썼다는 소설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 소설에는 한 여자가 등장한다. 여자는 서른네 살이고, 작은 미디어 회사의 기획팀원으로 일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독립영화를 찍고 있다. 여자가 미디어 회사에 입사하게 된 건 우연이었다. 영화를 찍고자 마음먹게 된 것도 의지보다는 우연의 영향이 더 컸다.

  물론 이 소설에 대해서 아무도 더는 알지 못한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소설은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쓴 (소설이고, 그렇다 해도 공모에 보내기는 했지만, 결국 떨어진) 소설이기 때문이다.

  참 재미있게도, 그 소설의 일부가 예언처럼 맞아떨어졌는데, 바로 여자가 회사에서 진행하는 홍보 영상 촬영 현장에서 수상 소식을 홀로 전해 듣는 장면이었다. 그와 비슷한 일이 20214, 나에게도 일어났다. 촬영 장비를 차에 싣기 위해, 스태프들이 모두 떠나버린 현장이었다. 나는 옷을 갈아입는 배우들을 기다리느라, 어느 아파트의 복도에 혼자 남아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핸드폰을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자음과모음 편집부였다. 당선 소식을 전해 듣고, 혼자 호들갑스럽게 좋아하고 전화를 끊고 보니, 주변이 너무 적막해서 꿈을 꿨나 싶었다.

  실은 그때 나는 퇴사를 앞두고 있었고, 그날은 촬영 현장에 가는 마지막 날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그날, 현장에 나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혹시 모르지 않나. 나는 이런 걸 너무 잘 믿는 건 아닌가 싶다. 소설은 아무것도 예언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상식적으로 따지자면 우연일 뿐이다. 그럼에도 자꾸 연관 짓게 된다. 소설에는 어떤 힘이 있다고, 예언이든 뭐든 소설은 해낸다고 믿게 된다.


  (…)


  돌이켜보면 지금의 나는, 사람들이 보내준 믿음의 합이자 그 믿음이란 예언의 결과물인 것 같다. 이제는 나도 누군가를 믿어줄 차례인 걸 안다. 소설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에게, 나의 믿음을 작은 보답으로 보내드린다.

  마음이 조급해질 때, 조금 늦어도 좋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결국 우리의 예언은 이루어질 테니까.



출처 : 자음과모음 출판사, ≪자음과모음 2021.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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